우리나라 최초의 버스여차장 - 버스걸의 인기는?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버스 요금을 받으며 출입문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던 버스여차장
1989년 12월 30일자로 자동차운수사업법이 개정 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한 때 버스여차장의 인기는 지금의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릴 정도로 인기 많은 직업 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 버스여차장이 생긴 것은 언제? 왜 였을까요?
조선 최초의 버스여차장
1928년 봄, 경성부청(시청)은 처음으로 농경에서 운행하는 20인승 대형버스 10대를 일본에서 들여와 전차가 들어가지 않는 이면도로, 간선도로에 투입해 시민의 교통을 도왔습니다.
이때까지 서울은 물론이지만 평양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도 버스가 없었고 택시들과 전차뿐이었습니다.
택시는 차비가 너무 비싸 서민들이 이용하기에는 부담이 컸고, 전차는 차비가 쌌지만 대로만 다니기 때문에 시민교통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버스를 들여 놓고 경성부청에서는 엉뚱한 발상을 했습니다.
“청장각하, 이번 부영버스를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도록 인기작전을 쓰면 어떻겠습니까?”
당시 경성부청은 동경 시내버스를 이기고자 버스에 여자 안내원을 고용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부영버스는 여쁜 처녀들을 모집해 양장을 시켜 버스에 태워 호기심 많은 더 많은 승객들을 부영버스에 태울 계획을 세웠고 신문에 버스 여차장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조선의 처녀들은 부끄럼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응모하는 아가씨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애가 탄 담당관은 결국 여학교를 찾아다니며 담임선생들을 붙들고 사정하여 겨우 10여 명을 모집, 교육시킨 다음 버스에 태웠습니다.
“고것 참, 오늘 낮에 부영바스를 거금 7전을 주고 한 꼭지 타보았는데 그 여차장 정말 삼삼하게 예쁘던데."
이 소문은 곧 서울 장안으로 퍼져 나가 예쁜 처자들이 새로 생긴 부영버스에 타고 다니며 표도 끊어 주고 안내도 한다는 바람에 서울 장안 총각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버스여차장의 인기
버스 여차장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할 일 없는 부잣집 도령들은 주먹밥을 싸 들고 점찍은 차장아가씨를 유혹하느라 버스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타고 다니며 추근거리는 새 풍속극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당시 조선에서 최고 엘리트라 불리웠던 경성제대 학생들이 사각모를 비스듬히 쓰고 올라타서는 슬금슬금 놀려대도 싫어하는 기색없이 오히려 은근한 눈길을 주던 여차장들 때문에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높게 치솟은 버스여차장의 인기는 1930년대가 되어도 식을 줄 몰랐습니다.
일명 '버스걸'이라 불리우며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경전버스와 유람버스 등에서 약 40여명의 버스 여차장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신상명세를 서울 장안 총각들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부하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버스걸은 신부 후보감으로 첫손에 꼽혔다고 합니다.
심지어 버스여차장에서 배우로 변신한 여성도 있었습니다.
당시 활동하던 영화감독 윤백남은 버스안내양 중에서 그 미모 때문에 가장 인기 높던 경성 유람버스의 여차장을 섭외하였습니다.
그녀는 처음 연극인으로 동양극장과 부민관에 데뷔하였을 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1935년에 접어들면서 영화 배우로도 출세하여 연예계의 히로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한 버스여차장
버스안내양은 광복이 되고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신 남자 차장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서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해방 후 1959년 2월,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600대 가까운 시내버스의 차장을 모조리 여차장으로 교체를 하였습니다.
사라져 버린 버스여차장
1984년부터 버스에는 하차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개설되어 승객이 하차하기 직전에 버스벨을 누르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버스안내양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 입니다.
1987년 말 3만 여 명에 달했던 버스안내양은 1989년 4월 김포교통 소속 130번 버스안내양 38명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