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택시운전사 이정옥
1920년대, 한국 최초 여성 택시 운전사로 10년간 무사고 기록을 세우며 서울 운수업계의 택시여왕으로 불리웠던 이정옥
그녀는 오산 보통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다가 산파업으로 전환하여 2년 동안 일했습니다.
하지만 수입이 적고 재미가 없어 과감하게 여성 택시기사에 도전, 당시 택시기사 등용문이었던 동양자동차연구소에서 남자들과 같이 야외로 실습을 나가며 운전을 배웠습니다.
택시운전기사 이정옥
당시 그녀는 "여자가 자동차 운전을 한다면 호기심에 끌려서라도 한번씩은 다들 타볼 게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여성이 택시운전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여자가 택시를 운전한다니까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습니다.
"이왕이며 여자 운전수를 불러라, 히야카시나 좀 하자꾸나! "('히야카시'는 희롱을 뜻합니다.)
또 어떤이는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하겠다며 비아냥 거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자동차운전을 한다고 못마땅히 여겨 등을 돌리고 발길을 끊었으며 일절 자동차를 타지 않고 인력거만 이용하리 만큼 보수적인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택시여왕이 된 이정옥
여자 운전수라는 이유로 희롱을 당하고 집안의 반대도 거셌으나 꿋꿋이 버티며 주로 부호의 자제들이나 야간에 취객이나 기생들을 태우며 월 평균 600원을 벌던 이정옥
1927년, 그녀는 '대양택시' 라는 운송회사를 개업 하였습니다.
이후 이정옥은 집을 담보로 크라이슬러 두 대를 월부로 구입, 본격적인 택시 업계에 뛰어 들었습니다.
당시 크라이슬러 한대 가격은 약 3,000원, 이정옥은 전세료가 100원이나 하는 백천이나 온양의 온천으로 장거리 운행을 해 수개월 만에 차값 6천 원을 모두 갚아버렸다고 합니다.
대양 택시회사를 개업한지 5년만인 1932년, 이정옥은 당시 경쟁상대였던 동양택시까지 인수하여 총 10대의 택시를 굴리는 서울 운수업계의 택시여왕으로 군림했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현역 운전사였으며 또한 10년간 무사고 기록을 세우며 총독부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잘 나가는 택시회사의 여사장인 된 이정옥은 당시 대중잡지 였던 '별건곤'에 소개가 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명해지자 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를 만나고자 집요하게 전화를 걸던 사내가 있었던 것 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대양택시 여사장님 댁입니까?"
“그렇습니다마는 누구신지요?"
“예, 저는 다름아닌 이여사를 사모하는 한 남성이올시다. 무례하게도 밤중에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만 한번 만나 주실 수 없을 까 하고 청을 드립니다.”
당시 이정옥은 이미 혼인을 한 유부녀 였습니다.
당연히 이정옥은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무려 두 달가까이 밤에만 전화를 걸어 갖은 수작을 떨며 이정옥을 괴롭혔습니다.
결국 충무로 모다방에서 이 남성을 잡았고 충무로 파출소에서 7일간 구류를 살도록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희롱과 스토킹 그리고 또 시댁의 반대를 모두 이겨낸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택시기사 이정옥, 그녀는 조선여인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항상 한복을 입고 운전을 하며 끈끈한 기개와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고로 시댁과는 화해를 하였습니다.
외출을 하시는 시아버님을 차에 억지로 태우고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친구분이 기다리신다는 장소로 모셔다 드렸더니 차에세 내리시던 시아버님이 그 동안 고집을 부려 미안하다 사과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은 총독부에서 표창을 받은 이후 의친왕 이강 공 부인의 자가용 운전수로 제안을 받았으나 시댁의 체면을 위해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정옥으로 부터 시작한 여성 택시운전 100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766여명의 여성택시 운전기사가 있습니다.(개인 482명, 법인 284명 -2017년 기준,서울도시교통본부 택시물류과)